3절 우리가 말(Horse)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
8절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느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13절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18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혀'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미디어를 통해서도, 내 자신에 대해서도 늘 관찰되는 현상이다.
사람들은 세치혀로 세상을, 타인을 통제하길 윈하고, 그 자신도 타인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말의 지배 아래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혀로 상대방을 쉽게 상처주고, 우리 안의 악을 드러내기도 한다. 성경말씀에도 나와 있듯이 사람들은 분명 이것이 자신의 몸에 붙어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능히 다스리질 못한다.
교묘한 술책을 꾸미는데 혀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불길 속에서 미친듯이 날뛰는 통제 불가능한 짐승처럼 좌우앞뒤 분간 없이 쏟아져나올 때도 있다. 특히 부정적인 감정이 우리를 지배할 때.
'부정적인 감정'의 근원은 '상황'이 자초하는 경우도 있지만 '상황'을 대하는 '개인적인 프레임' 안에서 왜곡되거나 증폭되는 경우들도 많다. 즉, 그 상황이 주는 메시지가 너무 개인적인 약점이나 퇴적암처럼 축적된 감정의 늪 속으로 훅 들어와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게 되어 오작동하는 반응을 뱉어내는 경우들이 있다.
내가 나 자신의 언어를 통제 할 수 없음을 직면할 때, 특히 아침에 말씀을 묵상하고 그렇게 다짐을 하고 세상속으로 걸어들어갔지만 말씀은 온데간데 없고, 통제 되지 않는 상황 속에 분노에 사로잡혀 언어로 누군가의 아침을, 하루를 박살내고야 마는 상황을 초래하게 되었을 때 그 상황의 가해자이면서도 동시에 목격자로써 참담함과 좌절을 맛보는 경우가 반복되는 나날이 이어지고 있었다.
주말이 시작된 토요일 밤에 이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너무 끔찍하고 갑갑해서 잠이 오지 않았다. 여러번 기회를 주어도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스스로 분석하고 개선할 의지가 조금도 없는 업체에게 꾸역꾸역 이것저것 들이밀면서 회유도 해보고 정답을 유도심문하여 떠먹여도 줘보고, 다그쳐도 보고, 별 짓을 다했지만 아무런 결과가 없는 상황이 1년이 넘도록 지속되자 이제는 내가 소진되고 고갈되는 지경에 이르니 안될 것에 왜 이렇게 에너지를 쏟아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냥 다 내려놓자, 그들이 마주하게 될 운명은 전적으로 이 상황에 오기까지 매너리즘에 빠져 남탓, 상황 탓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그들의 책임인 것이거늘, 이제 더이상 상관하지 말자라는 결론을 내리고 갑갑한 마음을 움켜쥐고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날이 되었는데 어제 자기전에 내린 결론이 온전하지 못한 결론이라는 생각이 들어 이 결론을 그대로 들고 다음 주를 맞이하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포기를 못하는 걸까. 안되는걸 안된다고 받아들이지 못하겠다. 나는 맺고 끊는 것에 있어서는 한번 마음을 세우면 칼같이 정한 대로 하는 사람인데 이 일에 있어서만큼 그걸 하지 못하고 있다. 내가 이 문제에 있어서 더이상 애쓰고 노력하는 것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곧 '화평게 하는 것'과는 멀어지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다.
때마침 오늘 청년부 예배에서도 목사님이 '화평케 하는 것'에 대한 말씀을 하셨다
마태복음 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에게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영광이 있다는 말씀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지금은 나의 작음과 지혜 없음을 두고 하나님께 올바른 방법으로, 방향으로 화평케 될 수 있도록 상황을 주관하여 주시길 기도하는 것 밖에 없는 것 같다. 하나님이 이제 됐다고 할 때까지.